12.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은 열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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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은 열렸나?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 승인 2024.04.1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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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제부터 반포까지, 드러나지 않은 고통의 시간
훈민정음 반포도(상상) [세종 28년(1446) 9월 상한].   /김학수 그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10월 9일 한글날은 한글(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준으로 삼았다. 정확히 말하면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 1446년 음력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현대 양력인 그레고리력 기준으로 바꾼 날짜이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반포식을 했을까? 반포 후 기념식은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그린 훈민정음 반포도는 가상으로 그린 상상도이다. 사실이 아니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한편으로는 이런 반포식을 열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가 찡하게 다가온다.

훈민정음이 우리 민족의 미래를 활짝 열어 준 사건인 만큼 성대하고 화려하게 반포식을 열었으리란 상상을 하기 쉽다.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즐겁고 설레는 상상이다. 하지만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은 반포식을 치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훈민정음 해례본 완성 사실을 알린 최초 기록 《훈민정음》 해례본 정음해례 29ㄱ(65쪽).

첫째, 반포식을 했다는 역사 기록이 없다. 반포식을 하지 않았다는 두 번째 근거는 당시의 분위기다. 주류 문자가 한자였고 이를 사용하는 권력의 중심인 중국과 사대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반포를 거창하게 연다는 것은 한자 중심의 세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임금의 권력이 막강하고 주체적인 문화를 이끌 정도로 존경받는다고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 번째 근거는 국가적 행사인 반포식을 열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훈민정음 반포는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부 학자만이 동의한 상태였을 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런 터에 공개적으로 반포식을 치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경국대전》 같은 중요한 책도 반포식은 없었다.

반포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반포 방식은 교지와 서책 등 다양한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반포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두 가지다. 해례본의 정확한 완성 날짜는 해례본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세종과 함께 해례본을 집필한 대표적인 신하인 정인지가 ‘정통 11년 세종 28년, 1446년) 9월 상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정인지는 두 손 모아 머리 숙여 삼가 쓰옵니다.(正統十一年九月上澣, 資憲大夫禮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 世子右賓客臣鄭麟趾, 拜手稽首謹書)’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달(1446년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됐다는 사실을 기록한 《세종실론》 1446년 9월 29일 달별 기사.

정통 11년은 1446년, 상한은 상순(上旬)이라고 하며 1일부터 10일까지를 가리킨다. ‘상한’이라는 말 자체로는 정확한 날짜를 가늠할 수 없지만, 간행 날짜의 범위는 열흘 이내(9.1~9.10)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조선왕조실록》 1446년 음력 9월 29일 달별 기사(한 달 기사 사건 묶음 기사)로 ‘是月 訓民正音成(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때의 《훈민정음》은 문자가 아닌 책 이름을 뜻한다. 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책이 완성되어 간행했다는 의미다.

이렇게 행사 형식의 반포식은 열리지 않았지만, 해례본을 간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반포의 의미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해례본 집필에 참여한 사람들은 훈민정음 반포가 얼마나 중요하고 거창한 일이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훈민정음 해설서 집필에 참여한 8명의 신하들은 정인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정음 창제는 앞선 사람이 이룩한 것에 따른 것이 아니요, 자연의 이치를 따른 것이다.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없는 곳이 없으니, 사람의 힘으로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다. 무릇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온전하게 이루게 하는 큰 지혜는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盖有待於今日也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訓民正音成(훈민정음성)’이란 표현은 원고 완성 정도이지 책 간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成’이 책의 완성(간행)을 의미하는 기록은 실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태조실록의 태조 1년(1392년) 10월 12일 자에 보면 “-앞줄임 -기록하여 책을 만들어서 장계(狀啓)와 함께 올리오니, 비옵건대,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여 영구히 성법(成法)으로 삼게 하소서.(具錄成冊, 隨狀投進, 乞許頒布中外, 永爲成法).”라는 구절이 나온다. ‘成’이 원고 완성의 의미도 있겠지만 이렇게 책의 완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결국 ‘반포’가 교지나 반포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한 반포도 일반적인 관례인 셈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디서 인쇄했을까?

1446년 음력 9월 상한에 완성된 《훈민정음》 초간본(여러 차례 간행된 책에서 맨 처음 간행된 책)을 《훈민정음》 원본이라 한다. 이 책을 어디서 제작했을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경복궁 안 주자소에서 제작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세종은 지금의 서울시 충무로에 있던 주자소를 세종 17년, 1435년에 9월 12일,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11년 뒤인 1446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 것이니 주자소가 훈민정음 반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주자소도 [세종 17년(1435)에 경복궁 안으로 옮긴 주자소에서 책을 인쇄하는 광경].   /김학수 그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세종이 일종의 인쇄소이자 출판사 구실을 하는 주자소를 경복궁으로 옮긴 것은 책 제작과 보급을 국가 주도로 해야 했고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경복궁 안으로 옮긴 뒤 한달쯤 뒤인 10월 19일 세종은 직접 옮긴 이유를 밝혔다. 주자소는 처음 설립할 때부터 주요 관청으로 승정원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했는데, 관사(官司)가 대궐 밖에 있어 일이 지체된 것이 많아 대궐 안에 옮겨 승지가 직접 관리하게 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긴 뒤 책을 통한 교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었다. 이를테면 1437년 7월 23일(세종 19년 40세)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농사직설≫ 등을 활용해 농사짓는 법을 백성에게 권장하게 했다. 1444년 윤7월 25일(세종 26년 47세) 옛 성현들의 교훈이 담긴 ≪권농교서≫를 반포하여 백성들이 부지런히 농사에 힘쓰게 할 것을 전국의 관리들에게 하교했다. 이런 과정에서 세종은 한문으로 된 책의 한계를 더 절감했을 것이다.

‘주자소’의 ‘주자(鑄字)’는 금속활자를 의미하지만, 목활자와 목판본 인쇄도 주자소에서 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기록화는 늘 활기가 넘쳤을 세종 시대 주자소 풍경을 그린 것이다. 필자의 역사그림책(그림: 이형진) ≪하마터면 한글이 없어질 뻔했어!≫(한울림)는 창제부터 반포까지 주자소를 중심으로 경복궁 안에서 벌어진 사건을 상상으로 복원해낸 것이다.

창제에서 반포기간
세종, 질병에 시달려

세종은 21세 때인 1418년에 즉위하여 즉위 25년째인 46세(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즉위 28년째인 49세(1446년)에 반포한 뒤 53세(1450)의 나이로 승하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즉위 28년에 훈민정음 28자를 반포했다.

 

1443년 창제 후부터 1446년 반포까지 과정을 그린 필자의 역사 그림책(그림 이형진) 《하마터면 한글이 없어질 뻔했어!》 장면.

여기서 우리는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가 세종 생애 막바지에 이루어졌음을 주목해야 한다. 21세에 임금이 되어 나라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고 창제하고 반포한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천문학, 수학, 철학, 과학, 음악, 언어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발전시켜 이를 녹여내 나왔음을 의미한다.

세종은 창제 12년 전부터 안질을 앓고 있었다. 창제 2년 전 1441년(세종 23년) 2월 20일 실록 기록에 의하면 “내가 눈병을 얻은 지 이제 10년이나 되었다,(予得眼疾, 今已十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4월 4일에는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서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에 어려웠다.(予兩眼昏花澁痛, 自春以來陰暗之處, 非杖難行)”라고 밝히고 있다.

다행히 이 날은 상태가 나아져 “어젯밤에 이르러서는 본초(本草)의 잔 주석(註釋)을 펴놓고 보았는데도 또한 볼 만하였다.(至前夜則披閱《本草》細注, 亦可見也)”라고 밝히고 있지만 안질은 책을 많이 보아야만 하는 훈민정음 해례본 작업에 큰 지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세종의 눈은 점점 어두워져 갔지만, 백성의 까막눈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세종 생애와 훈민정음 창제, 반포 위치도. @김슬옹

건강 못지않게 직계 가족의 죽음은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반포 2년 전인 1444년(세종 26년)에는 인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산수, 무예까지 두루 능했다고 하는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李璵)가 급성 전염병을 앓다가 19세로 죽었다. 그 다음해인 1445년에는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 이임(李琳)이 홍역을 앓다가 18세에 죽었다. 세종은 해례본이 나오기 6개월 전인 1446년 3월에는 소헌왕후가 50세의 나이로 운명하는 극한의 슬픔 속에 있었다.

세종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온갖 제도의 중심에 있었으니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개인사적으로 몰고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는 세종의 개인 의지와 노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직계 가족 세 명을 잃는 극한의 슬픔 속에서도 해례본을 완성해야 했다. 시대적 상황을 존중하되 그 시대를 뛰어넘었던 인물이 있었기에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빛나는 문자를 쓰고 있는 호사를 우리는 누리고 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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