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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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과 소장
  • 김슬옹
  • 승인 2024.04.2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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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지 않고, 지키지 못하면 보물이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 무렵,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것은 해례본이 땅속 깊숙이 묻혀 있다가 발견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소장 사실을 몰랐거나 인지했다 하더라고 공적으로 논의가 되지 않아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발견하지 않은 보물은 보물이 아니며, 지키지 못한 보물 또한 보물이 아니다.

그래서 해례본 원본을 최초로 발견한 이용준(李容準, 1916년-2000년 전후 북에서 사망 추정)과 이를 제대로 보존하고 세상에 알린 전형필(全鎣弼, 1906-1962) 두 분의 공로가 무척 크다는 것이다. (2008년 배익기 발견, 상주본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간송본)에 대한 최초 보도(방종현, 조선일보 1940.7.30.4쪽). 800여 자의 소개 글과 더불어 제자해 일부 번역[정음해례4ㄱ까지]을 실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1446년에 간행 반포된 것도 기적이었지만, 1940년에서야 발견된 것도 기적이었다. 이때는 일제가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 정책으로 한민족 말살 정책을 펼치던 우리 겨레의 암흑기였기 때문이다. 무척 경사스러운 사건이었지만 발견자(이용준)나 소장자(전형필)나 은밀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조선일보에만 일반 기사처럼 조용하게 드러났다. 1940년 7월 30일 자에 훈민정음 해례본 번역문 일부가 방종현의 이름으로 4쪽에 실린다. ‘原本 訓民正音의 發見(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란 제목이었고 8월 4일까지 5회에 걸친 연재물 첫회였다. 일제는 한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8월 11일 폐간했는데 결국 폐간 직전에 해례본은 번역문 형식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번역문 앞에는 그 사연이 실려 있는데 방종현과 홍기문이 그동안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으로 알고 있던 언해본이 사실은 원본이 아님을 알고 원본을 찾던 중에 “수개월 전 그 원본은 경북의 어떤 고가에서 발견되어 시내 모씨의 소유로 돌아간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이제 먼저 그 원문의 번역을 싣고 뒤를 이어 거기에 대한 우리 두 사람(홍기문, 방종현)의 연구를 발표하겠다는 것이다. 번역은 해례본 책을 입수한 지 겨우 열흘이 안 돼서 했다고 한다. 방종현 본인 이름으로 발표하지만, 홍기문과 함께한 공동 작업 결과임을 덧붙였다.

해례본 발견 직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훈민정음 언해본>을 훈민정음 원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일보도 1940년 1월 3일 자에 ‘훈민정음 언해본’을 원본이라 소개했는데 7개월 만에 그것이 원본이 아니라 진짜 원본이 나타났다고 보도한 셈이다. 몇몇 전문가들만이 언해본이 아닌 다른 원본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터에 원본이 발견 공개된 것이다

전형필, 원본을 지키다

결국 해례본의 실체를 언론에 처음으로 알린 이는 당시 35세의 방종현(1905년~1952년)이었고 37세였던 홍기문(1903-1992)과 함께 해례본을 번역하여 연재 방식으로 이 사실을 처음으로 공표하였다. 조선일보에만 보도된 것은 번역자 홍기문이 조선일보 직원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38년 <간송미술관> 완공 후 기념사진 (아이는 고 전성우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방종현 글에서 말하는 ‘고가의 원본’이 바로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간행한 《훈민정음》 해례본 초간본을 말한다. 간행한 지 무려 494년 만에 그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났다. ‘시내 모씨’는 바로 해례본 소장자 간송 전형필을 가리키고, 이때의 훈민정음 원본을 전형필의 호를 따서 흔히 간송본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특종으로 대서특별 되었겠지만, 이때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1941-1945)을 준비하던 무시무시한 때였다. 간송은 이런 시대적 위험성을 알고 모든 것을 신중히 했다.

그 증거는 방종현 소개글이 말해 주고 있다. 발견한 곳, 소장자를 모두 익명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간송의 은밀한 부탁이 있었을 것이다. 발견자는 해방 이후에나 밝혀지는데, 경상북도 안동의 이용준으로 그의 스승이었던 김태준(金台俊, 1905-1949년)과 함께 전형필에게 매각하였다. 김태준은 당시 경학원(성균관대 전신) 강사였는데 이용준 제자를 도왔던 것이다.

이용준은 안동에서 학식과 인덕이 뛰어나고 교육으로 신망이 두터웠던 이한걸(李漢杰, 1880~1951) 선생의 셋째 아들로 해례본이 공개된 1940년에는 24세였다. 또다른 이름은 기범(奇範)으로 북한에서는 ‘리기범(李奇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16세였던 1933년에 두 살 어린 광산 김씨 김응수의 셋째 딸 김남이와 혼인하고 19세 때인 1936년 서울 명륜학원 연구과(현,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이용준과 김태준의 해례본 매각 사실은 광복 후, 1950년 이후에나 자세히 밝혀진다. 유열(1950)의 ‘訓民正音 원본의 발견 및 유래(《홍익》 창간호, 홍익대학교 학도호국단 문화부)’와 정철(1954)의 ‘原本 訓民正音의 保存 經緯에 대하여(《국어국문학》 9, 국어국문학회)’, 보성고등학교 교사였던 김계곤(1964)의 ‘훈민정음 원본 발견 경위에 대하여(《보성》 3, 보성고등학교)’ 등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발견자(이용준)에 대해서는 일치하나 발견한 장소에 대해서는 이용준 친가(진성 이씨 종택)설과 이용준 처가설(광산 김씨 긍구당가)로 나뉘게 되었다. 필자는 두 집안을 직접 방문하여 답사도 하고 후손들 면담도 했지만 양쪽 주장이 팽팽히 맞서 있다. 두 집안 모두 고서를 보존해온 명문가 집안들이고 소장 맥락도 충분하다. 그런데 발견자인 이용준, 조력자인 김태준, 소장자인 전형필 그 누구도 발견처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없다. 발견처를 입증할 명백한 증좌도 없으므로 아쉽지만 더 결정적인 것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집안의 세전가보(世傳家寶)를 남에게 넘긴 것이 부끄러워 비밀로 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 국가 전체로 보면 보존과 공유도 중요하니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이용준은 해방 전 월북해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 일을 했다고 하는데 남북 어디에도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발견지가 어디든 발견자가 이용준인 것만은 분명하므로 발견자로서의 공로는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간송미술관에 있는 간송 가슴상 앞에 선 필자.

해례본 기사는 지금 같았으면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될 사건이었지만, 한 신문에만 조용하게 번역 형식으로 드러났음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주도면밀한 전형필의 문화재 사랑과 해례본에 대한 공로가 숨겨 있다. 이때는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로 일제는 1938년에 우리 말과 글의 사용과 교육을 아예 금지한 터였다. 1940년은 바로 일본식 성명 강요를 단행한 시기였으므로 아마도 전형필은 일제를 의식해 대대적인 공개를 안 했을 것이다.

훗날 정인승, 안병희, 김슬옹, 김주원 연구로 해례본의 초기 보급 경로가 밝혀진다. 정인승(1940)의 ‘古本訓民正音의 硏究(《한글》 82, 조선어학회)’, 안병희(2007)의 ‘송석하 선생 투사의 훈민정음(《한국어연구》 4. 한국어연구회)’, 김슬옹(2015)의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한말연구》 37호. 한말연구학회)’, 김주원(2017)의 ‘광복 이후 5년간(1945~1950)의 훈민정음 연구(《한글》 316호. 한글학회)’ 등을 통해서다.

최현배, 원본 입증

안병희(2007)는 훈민정음 학자 홍기문, 서지학자 송석하에게 모사본을 만들도록 해서 전형필이 전문가한테만 공개한 것으로 밝혔으나 김주원은 송석하에게 모사하도록 한 뒤 그 모사본을 홍기문이 입수해 최초 번역한 것으로 밝혔다. 강영주(2011)의 ‘국학자 홍기문 연구 3-일제 말의 은둔 생활과 학문(《역사비평》 96. 역사비평사)’에 의하면 홍기문은 원본을 잠시나마 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번역과 연구는 모사본을 보고한 것이다. 해방 후 전형필의 증언과 관련 연구에 의하면, 이용준이 처음 해례본을 발견한 것은 1938년에서 1940년 3월 이전이다. 전형필이 소장한 것은 1940년 3월~5월 무렵이 된다.

전형필이 언제부터 소장했느냐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간송이 1938년에 최초의 근대식 미술관이자 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하여 철저히 문화재를 보호하기 시작했고, 이에 힘입어 《훈민정음》 원간본을 소장하게 되었다는 점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곧 전형필이 해례본을 어느 날 우연히 소장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 끝에 소장했다는 점이다.

전형필은 1921년에 휘문고등 보통학교를 입학하는데 바로 이 해에 이 학교에서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이 학교에서 교장이 되는 임경재 선생이 조선어연구회 임원이었기 때문이다. 전형필은 휘문고등 보통학교를 20세였던 1926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23세 때인 1929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재학 시절에 당시 종로의 거부였던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1930년에 귀국하여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의 영향으로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20대 중반에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되었지만, 상속받은 거의 모든 재산을 문화재 지키는 일에 쏟아붓는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때는 해례본 소장 10년 전이었다.

26세 때인 1932년에는 종로구 관훈동 17번지에 백두용이 1905년에 세운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운영을 맡겼다. 해례본 소장을 위한 신의 한 수였다. 왜냐하면 <한남서림>은 해례본을 구입하는 핵심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6년 뒤인 32세 무렵인 1938년에 최고 신식 건물로, 지금의 사립미술박물관인 <보화각>을 건립하였다. 일제의 우리 말과 문화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에는 학자들 사이에 훈민정음 언해본이 세종이 1446년에 펴낸 원본이 아니라 진짜 원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추론과 소문이 나돌던 시기였다. 결국 보화각 건립 1년 뒤인 1939년에 해례본 소식을 듣게 되었고 1940년에 소장하게 된 것이다.

해례본 전문이 최초 공개된 것은 1940년 10월 15일 《정음》 35호(-22쪽)에서 홍기문 소장 모사본을 활자로 실리면서다. 이해 12월에 정인승은 ‘고본 《훈민정음》에 대하여’라는 최초 해제를 《한글》 82호(조선어학회, 3-16쪽)에 실었고, 최현배는 1942년 4월 30일 출간된 《한글갈》에서는 원본 고증과 소장자를 최초 공개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전문 인쇄본을 수록했다(송석하, 홍기문 모사본으로 추정). 최현배(1942/1982)의 《한글갈》(정음문화사)에서는 이 책이 원본임을 입증한 뒤 그 의의와 기쁨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지어내어 이를 반포하신 뒤로, 근 오백 년 동안의 ‘실록’에 도무지 ‘훈민정음’을 찍어 폈다는 기록이 없고, 또 최세진, 신경준, 유희 같은 한글 학자들도 그 원본을 보았다는 적발도 도무지 없다. 그래서 근년에 박(승빈)님 본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그것이야말로 원본이라고 떠들기도 하고 또 인정하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깊이 한글을 연구하는 공붓군들 사이에는 그것이 진정한 원본 될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되어, 진정한 원본이 나타나기를 고대함이 간절하더니, 천만 뜻밖에 영남 안동에서 이런 진본이 발견되었음은 참으로 하늘이 이 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중략) 여태껏 도무지 형태도 없고 말도 없던 ‘훈민정음’의 원본이 그 정연한 체재로 나타났음은, 한국 최대의 진서(珍書)임은 물론이요, 또 그 ‘해례’로 말미암아 종래 한글갈(正音學)의 여러 가지 의혹의 구름 안개를 헤치어 줌은 우리 심정의 둘도 없는 시원스러운 일이요, 과학 정신의 최대의 만족이다. 
                                           _최현배(1942/1982: 36-37)

이렇게 전형필은 전문가한테만 공개해 해례본의 가치를 알려 암울한 식민지 조국에 빛을 던져주는 한편 일제로부터 철저히 보호해 해례본이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고 광복을 맞이했던 것이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편집/ 김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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