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성 때문 전자제품 수 늘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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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성 때문 전자제품 수 늘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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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6.06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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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생각은 콘센트 넘어 밖으로 나가지 못해
신 동 혁 충북청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본지는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과 함께 6월부터 매주 ‘지구를 살리자’라는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어렵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동참을 원하시는 분들은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홈페이지(www.cjcb.ekfem.or.kr)나 페이스북에서 ‘지구를_살리는_시민실천_캠페인’,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을 검색하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6월의 주제는 ‘우리 그냥 끌까요?’ 라는 것으로 전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전기는 인류가 발견한 에너지 형태 가운데 소비 측면에서 가장 편리하고 안전합니다. 석탄이나 나무를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가죠. 전기가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고밀도 집적의 도시 발전이 가능해졌습니다. 전기가 없던 고대나 중세에도 도시는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100층이 넘는 건물이 즐비한 도심이 전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조명, 난방, 화장실, 100층을 오르내리는 것을 생각만 해도 아찔해집니다.

왜 전기와 고층빌딩이 결합하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만, 왜 굳이 고층건물을 지어야 했는지? 고층건물과 전기의 결합은 소비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최상의 결합이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마천루가 소비사회의 중심이 되어 상품 소비 문화의 전범(典範)을 만들고, 이 전범은 도시의 주변부로 의식의 변방으로, 국경을 넘어 주변부 국가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천루와 전기'는 자본주의와 환상의 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욕, 파리, 동경, 싱가폴, 홍콩 이제는 두바이가 그걸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전기는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회가 발전이라는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필수적인 사회 기반시설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는 오랜 시간동안 기후와 그 지역 조건에 맞는 삶의 양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프리카도, 알래스카도, 시베리아도, 사막지역도, 농촌도 자본에 의해 현대 도시와 다름없는 소비사회가 되면서 지역조건과 무관하게 도시와 동일한 발전경로를 따릅니다.

이렇게 전기가 사회발전전략의 핵심이 되어 지역의 조건과 무관하게 사회적 기반시설로 건설되면 전기는 선을 타고 어디든 가서 사용자에게 안전함과 쾌적함, 편리함을 제공합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전기제품은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집안을 살펴보면 편리함과 필요성 때문에 장만하였던 전자제품들이 조금씩 늘어나더니, 이제는 제품들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여 집주인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마당 빨랫줄을 대신한 건조기
사실 그 많은 가전제품들을 사면서 편리함과 필요성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그동안은 빨래를 마당 빨랫줄에 널어 햇볕에 말렸는데,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햇볕 좋았던 마당이 그리웠지만 베란다에 말렸습니다. 그런데 좁아서 베란다를 거실로 확장하면서 빨래 널어 말릴 공간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좋은 햇볕을 바로 앞에 두고도 건조기를 샀습니다. 또 써보니 나름 좋고 편리한 것 같습니다. 많은 전자제품들이 가지고 있는 편리함이 사실 알고 보면 건조기처럼 나한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거기에 익숙해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사회적으로 강제된 필요성 때문에 전자제품은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래서 쓰다 보니 편리한 것 같습니다.

그 편리함에 중독되어 자꾸 전자제품의 수는 늘어갑니다. 사회는 이것을 '발전'이라 하고, 경제는 이렇게 '성장'해 갑니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이 시장의 확대는 공간적으로 이뤄집니다. 도시와 농촌,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로. 그리고 공간적 확대가 한계에 봉착하면 상품 수를 늘려 시장을 내용적으로도 확대합니다. 밥조차 상품이 되는 겁니다.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면 이제 삶의 속도를 높여 소비의 속도를 빠르게 합니다. 우리 삶은 이제 정신없이 돌아가 하루가 48시간 아니 그 이상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너무 피곤합니다. 그 피곤으로 생긴 집안 일의 공백은 더 많은 가전제품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에 부응해 더 많은 가전제품이 나왔습니다. 결국 우리를 편하게 해준다는 가전제품이 사실은 성장이었고, 더 많은 성장을 위해 빨라진 삶의 속도를 뒷받침하는 굄돌에 불과한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개인적 편리함과 사회적 합리성
전기와 전자제품의 사용이 주는 편리함과 쾌적함 너머에 뭐가 있는지 우리 생각은 콘센트를 넘어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코드만 꽂으면 다 되었기 때문에 굳이 더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기는 선을 타고 오고, 선을 타고 오기 위해서는 고압의 송전탑도 설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발전이 되어야 한다는 기본적 사실조차 잊습니다. 고압 송전탑과 송전선로 건설로 인해 많은 지역이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원자력발전소로 인해 우리와 우리 후손들까지 수백만 년 동안 관리해야 할 방사능물질의 위험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석탄화력발전으로 인해 미세먼지도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론 편리함을 주는 전자제품들을 선택하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입니다. 합리적인 행동이 이처럼 사회적으로는 비합리적인 결과를 낳게 하기도 합니다. 합리성이란 말에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을 계산하는 범주가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어가 같다고 동일한 내용을 갖지 않습니다.

개인적 합리성은 가격 대비 성능을 봅니다. 사회적 합리성은 비용편익분석을 통해 결정됩니다. 어떤 것들을 비용으로 계산하고, 무엇을 편익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합리성은 달라집니다. 즉 사회적 합리성은 당대 사회적 의식과 그에 따른 합의에 따라 변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회적 합리성이 절대적이지 않고 즉 원전에 대한 비용편익분석이 사회적 의식의 변화에 의해 달라지면, 원전이 더 이상 안전하지도 경제적이지도 않게 되고, 냉방기가 주는 편리함과 쾌적함도 우리집 문밖으로만 나가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측면들에 대한 논의가 열리게 되면 비로소 개인적 편리함과 사회적 편리함이 일치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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