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 부마항쟁 때도 편의대 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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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 부마항쟁 때도 편의대 운용
  • 김천수 기자
  • 승인 2019.05.22 09: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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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 출신 홍성택씨, 고백 특별 인터뷰

박정희 유신정권 시기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당시에 편의대(便衣隊) 일원으로 활동했다고 처음으로 고백 증언한 특전사 출신 홍성택(62)씨. 충북에 거주하는 그가 지난 16일과 17일 연이틀 충청리뷰와 특별 대담을 가졌다. 언론과의 대면 인터뷰는 본보가 처음이다.

대담에서 홍씨는 조각난 지난 40년을 반추하고 현재 자신의 삶과 심경을 밝혔다. 기억의 파편을 잇는 한계로 사실과 다른 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역사 기록과 맞춰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적는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특전사 대원으로 편의대 활동을 했다고 고백한 홍성택씨가 고백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1978년 8월 논산훈련소를 통해 특전사령부 모 특전여단에 차출돼 특전사 대원으로 복무하고 1981년 5월 제대했다. 1980년 전역한 것으로 알려진 건 잘못된 기억에서 비롯됐다.

홍씨는 복무 기간 중 1979년 이른바 ‘부마사태’ 전후 1개월가량 부산과 마산에 머무는 동안 편의대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편의대는 사복 차림으로 학생들에게 접근해 시위 계획을 밝혀내고 가담자를 색출하게 도움을 주는 특수 요원을 말한다. 홍씨에겐 편의대 활동이 응어리로 남은 마음의 빚이었다.

그러던 중 홍씨는 지난 1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전화 인터뷰에서 자신이 당시 경남 마산에서 편의대 활동으로 대학생들을 검거하도록 신고자 역할을 했다고 고백했다. 이날 홍씨의 증언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육군 501정보여단 광주파견대에서 근무했던 김용장 전 군사정보관의 증언에 대한 반응이다. 전날 김씨는 같은 방송에서 5.18 때 30∼40명의 편의대 활동이 있었음을 미국 정보당국에 보고했다는 점을 증언했다. 그러나 김씨는 다른 곳에서의 편의대 활동에 대한 진행자의 질문에는 알 수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이에 홍씨는 방송을 듣다가 ‘내가 1979년 부마민주항쟁 때 편의대로 활동했다’는 내용의 문자를 CBS에 보냈다. 이 같은 내용의 홍씨 고백은 이튿날 방송인터뷰를 통해 전국으로 전파됐다. 5.18 때 편의대가 있었다는 김씨의 증언에 이어 박정희 정권 때도 이미 편의대가 운용됐다는 역사적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방송 보도 뒤 홍씨에겐 각종 언론사와 영화사, 부마항쟁 관련 단체 등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러나 당시에 편의대 활동이 있었다는 점과 자신이 참여한데 대한 참회의 뜻만 밝히고 싶었다는 게 그의 속마음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홍성택씨의 특전사 당시 군복을 입은 모습. 부마항쟁 속 편의대 활동 때는 군복을 벗고 사복을 입고 움직였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편의대 활동 상황을 보자. 학생처럼 보이는 개인 복장으로 주로 다방 등에서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만나 시위 계획 등을 물었다. 학생들이 11월 3일 학생의 날 집회 계획을 밝히면 홍씨는 오른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사전 계획된 대로 미리 따라 붙은 형사들이 체포 연행하는 수법이다. 특전사와 경찰이 공동으로 편의대를 운용했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이 시기는 해당 병력이 경남대에 진을 쳤던 때다.

그가 편의대로 선택된 것은 대학 1학년을 중퇴하고 갓 입대한데다 앳돼 보이는 얼굴로 대학생과 다름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는 “돌아보면 사복을 입혀준다는 해방감과 빨갱이를 솎아낸다는 애국심에서 거리낌이 없었다”면서 “교육 훈련으로 정신이 무장된 특전대원이었다”고 회고했다. 학생들과 대화 중 신호에 따라 형사들이 급습하면 자신도 함께 연행되면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편의대 활동이 발각되지 않도록 학생들과 함께 편의대원을 체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의 구체적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버스에 오르면 학생들이 꽉 들어찰 정도였다. 그 속에서는 행동이 굼뜨면 폭력으로 기잡기가 일쑤였다. 자신에게 폭력이 가해질 때 편의대임을 밝혀 국면을 벗어난 장면은 지금도 기억으로 선명하다.

그러나 편의대원의 숫자나 또 다른 동료의 활동 모습 등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하사관들과 일반 사병들의 업무는 구분돼 있었다. 그는 방송에서 밝힌 것처럼 학생들을 향한 몽둥이질은 한 적이 없으며 부대원들이 한 행위 모두는 자신이 한 것과 같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그런 의미에서 마산 시민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힌 것이며, 특히 자신의 편의대 활동으로 잡혀간 당시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은 늘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기억은 특히 병력 이동과 관련해서는 비교적 선명하다. 일등병 때인 9월 중순께 특전여단 전체 특전대원 수백명 정도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합리적 시각으로 주민자치 활동
홍씨는 “9월 중순께 기차로 내려가 부산 수영비행장에 3일간 텐트를 치고 있다가 트럭으로 경남대학교로 옮겨 1개월가량 있었다”면서 “이 사이 세 번의 편의대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10.26사태가 터진 그날 밤 새벽1시(27일)에 급히 짐을 싸서 기차로 상경했다”고 회상했다. 상경하던 중 잠시 정차한 대전역에서 호외(號外) 신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부대 철수 이유를 알게 됐다고 기억했다.

이후 부대에 복귀하고는 12.12사태 때 긴급 출동해 선발대의 후방을 지켰고, 5.18 때는 고려대학교에 진지를 구축하고 대기했다. 해당 부대는 주로 수도권을 방위하는 데 힘썼지만, 광주로 진입하기 위해 수차례 완전군장으로 헬기장으로 이동하려는 순간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군복무 기간 홍성택씨는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는 빨갱이들 때문에 고생이 컸다’는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고 돌아봤다.

그렇다면 편의대 활동에 대한 반성의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1984년 고려대 집회 때 허인회가 틀어 준 광주사태 비디오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면서 “편의대 활동을 한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당시 심정을 말했다. 그는 “광주시민을 향한 군인들의 폭력이 내가 한 것처럼 미안했다”며 “많은 회개의 기도를 했었다”고 돌아봤다. 이후 그는 1987년 6월항쟁 때까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지금 그는 “당시 학생이나 군인 모두 동시대 젊은이들로서 품어 안아야 한다”며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자들이 나쁘다”고 말한다. 그는 풀뿌리 자치에 관심을 두고 합리적 시각을 가진 목회자다. 전국 주민자치 강사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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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민 2019-05-22 11:16:23
선생님도 피해자였습니다.
당시 어렸고 강압에 의한 것이지만 평생 맘속에 짐이셨을겁니다.
용기에 감사드리며
악랄했던 당시 정권은 심판받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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